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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바다가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불국사, 첨성대, 황리단길만 떠올리던 저에게 '경주 바다'라는 조합은 그 자체로 낯설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가봤더니 이건 단순히 바다가 있다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문무대왕릉, 양남 주상절리, 지경리 해식동굴까지 — 경주는 제가 알던 경주가 아니었습니다.
문무대왕릉과 이견대 — 바다 위에 잠든 왕
경주에 능이 있다는 건 누구나 압니다. 그런데 '바다 위의 능'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왕릉이라 하면 울창한 숲 속 봉분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은 동해 바다 한가운데 암초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해안가에 서서 그 암초를 바라봤을 때 느낀 감정은 경이로움에 가까웠습니다.
문무대왕릉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입니다. 여기서 수중릉(水中陵)이란 유해를 육지가 아닌 바다에 안장한 무덤 형식을 말합니다. 문무왕은 사후에 용이 되어 동해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신하들은 그 뜻에 따라 대왕암이라 불리는 바위 아래 유해를 모셨습니다. 이 사실은 출처: 경주시 문화관광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무대왕릉 바로 인근 언덕에 자리한 이견대(利見臺)에 올라서니 시야가 확 트였습니다. 이견대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과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로 이어지는 장소로, 쉽게 말해 왕과 아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던 전망 누각입니다. 이견대에서 내려다본 대왕암 방향의 바다는 제가 경주에서 본 풍경 중 가장 경건한 장면이었습니다. 능 앞에서는 요란하게 사진을 찍기보다 그냥 한참 서 있고 싶어 졌습니다.
또 이견대 아래쪽에는 신문왕이 완성하지 못한 감은사(感恩寺) 터가 남아 있습니다. 감은사란 문무왕이 짓기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승하한 뒤 신문왕이 완공한 사찰로, 용이 된 문무왕이 절 아래 수로를 통해 드나들 수 있도록 법당 바닥 아래에 특별한 통로까지 설계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이야기를 현장에서 직접 들었을 때 제 경험상 이건 책으로 읽을 때와 완전히 다른 울림을 줬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언제든 마주할 수 있도록 공간을 설계한다는 발상이 1,300년 전 이야기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 문무대왕릉: 동해 암초 위의 수중릉, 삼국통일 후 호국 의지가 담긴 유적
- 이견대: 문무대왕릉을 조망하기 가장 좋은 언덕 전망 누각, 경건한 분위기
- 감은사지: 용이 드나들도록 설계된 수로 구조물이 남아 있는 절터, 함께 방문 추천
양남 주상절리와 해식동굴 — 자연이 만든 조각품
경주하면 능과 사찰을 먼저 생각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양남 주상절리를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주상절리(柱狀節理)란 용암이 냉각·수축되는 과정에서 규칙적인 균열이 생기며 형성된 다각형 기둥 모양의 암석 지형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자연이 각도기와 자를 대고 깎아낸 것처럼 정교한 기둥 형태가 무수히 모여 있는 절벽입니다. 양남 주상절리 중에서도 경주 양남면에 위치한 '부채꼴 주상절리'는 기둥들이 부채꼴로 펼쳐진 형태로,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희귀 지형입니다. 이 부채꼴 주상절리는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관련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봤을 때와 파도소리 길을 따라 걸으며 가까이서 봤을 때는 감흥이 전혀 달랐습니다. 제 경험상 전망대는 전체 구도를 파악하는 데 좋고, 파도소리 길 약 1.7km 구간은 질감과 규모를 피부로 느끼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다만 파도소리 길의 이정표가 다소 부족해 처음 방문하는 경우 동선 파악이 쉽지 않았던 점은 아쉬웠습니다.
파도소리 길 끝 무렵에 자리한 지경리 해식동굴은 이 코스의 숨은 하이라이트였습니다. 해식동굴(海蝕洞窟)이란 파도의 침식 작용이 오랜 세월에 걸쳐 해안 절벽을 파고들어 형성된 자연 동굴을 말합니다. 제가 동굴 안쪽에 서서 입구 너머로 펼쳐진 동해를 바라봤을 때, 동굴 프레임이 마치 액자처럼 바다를 담아냈습니다. 역광을 이용하면 실루엣 사진이 꽤 멋지게 나왔는데, 이런 구도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해식동굴이 경주에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주말에는 혼잡할 가능성이 있으니 이른 오전에 방문하는 편이 훨씬 여유롭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경주에 진짜 바다가 있나요? 제주도나 부산이랑 다른가요?
A. 네, 경주 동쪽 해안선을 따라 실제 동해 바다가 펼쳐집니다. 관광 인프라가 발달한 부산이나 제주도와 비교하면 상업적인 시설은 적지만, 문무대왕릉처럼 역사 유적이 바다와 바로 맞닿아 있는 풍경은 경주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오히려 그 조용함이 더 좋았습니다.
Q. 양남 주상절리 파도소리 길은 얼마나 걸리나요? 체력이 약해도 걸을 수 있나요?
A. 파도소리 길은 전체 약 1.7km 구간으로, 천천히 걸어도 40~50분이면 충분합니다. 전반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해안 산책로라 체력 부담이 크지 않습니다. 다만 이정표가 다소 부족한 편이라 지도 앱을 미리 확인하고 가시는 편이 훨씬 편합니다.
Q. 문무대왕릉은 들어가서 볼 수 있나요?
A. 문무대왕릉 암초 자체는 바다 위에 있어 직접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해안가 전망 포인트와 이견대에서 외부를 조망하는 방식으로 관람합니다. 가까이서 보고 싶다면 주변 바위에서 망원 촬영하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며, 날씨가 맑은 날 방문하는 게 훨씬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Q. 문무대왕릉, 주상절리, 해식동굴을 하루에 다 볼 수 있나요?
A. 세 곳 모두 경주 동쪽 해안에 모여 있어 하루 동선으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습니다. 오전에 문무대왕릉과 이견대, 점심 후 양남 주상절리 전망대와 파도소리 길, 오후에 지경리 해식동굴로 이어지는 순서가 가장 효율적이었습니다. 단, 주말 방문 시 주상절리 인근 주차공간이 부족할 수 있으니 일찍 출발하는 편이 낫습니다.
결론
경주는 '역사 도시'라는 틀 안에 갇혀 있기엔 너무 많은 걸 품고 있습니다. 수중릉이라는 독보적인 형식의 문무대왕릉,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부채꼴 주상절리, 파도가 수만 년에 걸쳐 깎아낸 해식동굴까지 — 제가 직접 걸어보니 경주는 말 그대로 장르가 없는 여행지였습니다.
일반적으로 경주 여행은 불국사·석굴암 코스로 대표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동해 해안 코스 하루만으로도 경주를 다시 보게 만드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이정표 보강과 대중교통 인프라가 개선된다면 황리단길 못지않은 경주의 핵심 코스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경주 바다가 낯설게 느껴졌던 분이라면, 딱 한 번만 동쪽 해안으로 방향을 틀어보시길 권합니다.